말 못할 고민비맥스로 해결하는 자신감 회복법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작성일25-12-13 00:33 조회0회 댓글0건관련링크
-
http://66.cia367.net
0회 연결
-
http://26.cia952.com
0회 연결
본문
바로가기 go !! 바로가기 go !!
고개 숙인 남자의 말 못할 고민
비맥스로 해결하는 자신감 회복법
남성이라면 누구나 강한 자신감과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원합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과 스트레스, 노화로 인해 많은 남성이 발기력 저하, 성욕 감소, 성기 크기에 대한 고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비맥스VIMAX는 100 천연 성분을 활용하여 발기력 강화, 성기 확대, 성적 지구력 향상을 돕는 남성강장제입니다. 이제 비맥스를 통해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을 되찾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1. 남성들이 말 못 하는 고민과 원인
1 발기력 저하
발기의 강도가 약하거나 유지 시간이 짧아지는 현상
혈류 장애, 테스토스테론 감소, 스트레스 등이 주요 원인
2 성욕 감소와 만족도 하락
성적 흥분이 잘되지 않거나 성관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현상
호르몬 불균형, 피로 누적, 심리적 부담 등이 영향을 미침
3 성기 크기에 대한 고민
많은 남성이 크기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며, 만족도를 높이고 싶어함
음경 해면체 조직의 혈류량이 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함
2. 비맥스남성을 위한 최적의 솔루션
비맥스는 천연 성분을 통해 남성의 성기능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강력한 남성강장제입니다.
1 100 천연 성분의 강력한 효과
인삼 혈액순환 촉진 및 발기력 강화
마카 성욕 증가 및 성적 에너지 향상
징코 빌로바 혈관 확장으로 성기능 개선
톱야자 테스토스테론 수치 증가
카투아바 신경 안정 및 성적 흥분 증가
이 성분들은 발기력 증진, 성기 확대, 성적 지구력 향상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2 비맥스의 과학적 원리
혈관 확장 효과 성기에 혈액이 더 많이 공급되어 발기력이 향상됩니다.
음경 조직 강화 꾸준한 사용으로 성기의 크기와 굵기가 증가할 수 있습니다.
지구력 향상 성관계 지속 시간이 길어지고 성적 만족도가 증가합니다.
3. 성기 확대와 정력 강화의 과학적 접근법
1 성기 확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성기의 크기는 혈류량과 음경 조직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비맥스는 혈관을 확장시켜 음경 해면체 조직에 더 많은 혈액이 공급되도록 돕습니다.
꾸준한 사용으로 음경 조직이 더욱 탄력 있게 확장되며 크기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2 발기력 강화를 위한 핵심 원리
비맥스는 혈류 개선과 호르몬 균형을 맞춰 발기력을 강화합니다.
혈액순환 개선 빠른 발기 및 단단한 발기 유지
호르몬 조절 테스토스테론 증가로 성욕 상승
지구력 강화 오랜 시간 지속되는 성적 활력
4.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
비맥스는 단독으로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만, 아래 방법들과 병행하면 더욱 강한 정력과 성기능 개선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1 꾸준한 운동과 건강한 식습관 유지
유산소 운동조깅, 사이클링은 혈류를 증가시켜 발기력을 향상시킵니다.
단백질, 아연, 오메가3가 풍부한 식단은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촉진합니다.
2 충분한 수면과 스트레스 관리
수면 부족은 코르티솔을 증가시켜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방해합니다.
명상과 심리적 안정은 성욕과 발기력 유지에 필수적입니다.
3 비맥스의 올바른 복용법
하루 1정 복용
최소 3개월 이상 꾸준히 섭취
운동 및 건강한 식습관 병행 시 효과 극대화
5. 비맥스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
100 천연 성분으로 내성 없이 안전함
발기력 강화와 성기 확대 효과를 동시에 기대
성적 지구력 향상으로 더욱 만족스러운 성생활 가능
이제 비맥스로 자신감을 되찾으세요
비아그라정품구해요라는 질문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안전하게 구매하려면 공식 판매처나 하나약국 전문가의 상담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아그라정품약효는 복용 후 약 3060분 내에 나타나며, 개인의 건강 상태나 식사 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비아그라정품종류는 25mg, 50mg, 100mg 등 다양한 용량이 있으며, 필요에 따라 적절한 용량을 선택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비아그라지속시간은 46시간 정도이며,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공복 상태에서 복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올바른 복용 방법을 지켜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세요.
기자 admin@reelnara.info
구루-구리 다르. (1931)
1927년 겨울, 해발 4600m의 티베트고원. 끝없이 펼쳐진 회색 하늘 아래 칼날 같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밤이면 영하 60도까지 기온이 곤두박질치는 이곳. 산소가 희박해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죽음의 땅’ 한복판에 기괴한 벽이 세워졌습니다. 그 벽은 벽돌이 아니라, 얼어 죽은 낙타와 야크의 사체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그 벽 안쪽에는 티베트 원정대의 초라한 텐트가 있었습니다. 여름용 텐트의 얇은 천 너머 스며든 한기는 배낭 속 술병을 얼려서 릴게임종류 터뜨렸고, 태엽 시계의 태엽을 망가뜨렸습니다. 원정대원 다섯 명, 동물 90여마리가 이미 추위로 숨을 거둔 상황. 바람을 막기 위해 원정대는 어쩔 수 없이 동물의 사체로 텐트 주위에 방풍벽을 세워야 했습니다. 텐트 안의 사람들은 한데 모여 말없이 떨고 있었습니다.
히말라야( 오리지널골드몽 1933).
하지만 이 비극 속에서도 원정대 대장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습니다. 아침마다 그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눈 덮인 히말라야의 봉우리, 척박한 고원의 빛깔,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이상적인 세계. 그림 속 마치 환상처럼 짙은 파란색과 서늘한 보라색은 극한의 추위와 희박한 공기, 고산지대 온라인골드몽 의 직사광선이 만들어낸 사실적인 색채였습니다.
원정대장의 이름은 니콜라스 레리히(1874~1947). 세계적인 화가이자 탐험가, 고고학자. 인기 요가 수련법인 아그니 요가의 창시자이자 미국 부통령이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고, 훗날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요. 코끝 시린 겨울을 맞아 릴게임사이트추천 , 차가운 공기와 눈을 누구보다도 신비롭고 아름답게 표현한 레리히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레리히의 자화상.
화가가 나라를 세운다고?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류층 집안 출신 바다이야기오락실 인 레리히는 엘리트 코스를 골라 밟은 만능 인재였습니다. 그는 10대 때부터 선사시대 유적 발굴에 참여하며 고고학적 지식을 쌓았고, 대학에서는 법학과 미술을 동시에 전공했습니다. 그림 실력, 법학 지식, 행정력, 정치력을 모두 갖춘 덕분에 그는 1906년 불과 서른두 살의 나이로 러시아 최대 예술 학교(황실 예술 장려 협회)의 학교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1920년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미국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지만, 레리히의 성공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는 현지 부자들의 지원으로 뉴욕에 음악, 무용, 미술 등 예체능을 통합해 가르치는 ‘마스터 인스티튜트’를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가 ‘대박’이 나면서 그는 순식간에 뉴욕 문화계의 거물이 됐습니다. 뉴욕 맨해튼에 ‘마스터 빌딩’이라는 29층짜리 빌딩까지 올렸습니다.
위대한 희생(1910). 원시 종교를 묘사한 작품이다.
우상(1901). 슬라브족의 원시 종교를 묘사한 작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미술관
물건너에서 온 손님들(1901). 바이킹의 러시아 도착을 묘사한, 러시아 역사 관련 작품이다. 선명한 색채 대비가 인상적이다. /트레야티코프 미술관
하지만 누가 봐도 완벽한 이 엘리트 화가에게는 기이한 면모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불교의 구세주인 미륵불과 연결된 선택받은 존재라고 믿었거든요.
이렇게만 설명하면 레리히는 정말 위험한 인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레리히의 정신이 이상했던 건 아닙니다. 당시 유럽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신비주의와 음모론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같은 혼란이 벌어지는 시대. 사람들은 어떤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있다고 믿고 싶어 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술가는 특별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 이들이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 혹은 독특한 미신에 진지하게 빠져드는 예술가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마지막 천사(1912). 제1차 세계대전을 예견하는 종말론적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불타는 하늘, 천사의 강림을 그렸다. /뉴욕 레리히박물관
문제는 레리히가 압도적인 능력과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는 겁니다. 모든 걸 깨달은 듯한 레리히의 언행을 본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은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월스트리트의 거부(巨富) 루이스 호치가 레리히의 ‘물주’를 자처하며 그의 활동을 아낌없이 후원한 게 단적인 예입니다. 특히 당시 미국 정부의 농림부 장관이자 훗날 부통령이 되는 헨리 월리스는 레리히를 ‘나의 스승(Guru)’,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레리히는 이 거물 ‘제자’들을 등에 업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미국 농림부로부터 지원을 끌어내 ‘중앙아시아 원정대’를 꾸린 겁니다. 겉으로는 희귀 식물 표본을 모으는 게 목적이었지만, 그의 진짜 목표는 중앙아시아에 ‘이상적인 불교 제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조상들(1911). /옥스퍼드 애슈몰린 박물관
희박한 공기 속으로
1923년 원정대는 인도에서 출발해 히말라야로 향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샹발라(Shambhala)’를 찾는 것. 샹발라는 ‘샹그릴라’의 모티프가 된, 티베트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상향이었습니다. 그곳에 불교 제국을 세우고 여러 종교를 하나로 합쳐 인류를 새로운 정신세계로 이끄는 게 레리히의 목표였습니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발상입니다. 하지만 레리히와 후원자들은 진지했습니다. 이득을 챙길 꿍꿍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방향은 좀 이상했지만, 이들의 열정은 그저 순수했을 뿐입니다.
레리히가 원정 도중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향해 장관들을 만난 것도 이런 순수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소련의 고위 관료들을 만나 이렇게 제안합니다. “내가 아시아에 새로운 불교 국가를 세울 테니 지원해 달라. 그러면 소련과도 친하게 지내겠다.” 그의 머릿속에서 ‘만인의 평등’을 외치는 공산주의와 ‘자비’를 말하는 불교는 서로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소련 공산주의의 현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레리히의 행동은 간첩이나 할 법한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세계 각국이 물밑에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지, 이념 대립이 얼마나 무서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과 영국 정보부는 이 모든 과정을 싸늘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기억(1924).
1926년 초 중앙아시아를 걷고 있는 레리히.
어쨌거나 원정은 계속됐습니다. 수년간의 여행길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해발 5000m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추위와 산소 부족, 눈보라, 그리고 도적 떼와의 사투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레리히는 태연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유화 물감 대신 영하 40도의 혹한에서도 얼거나 갈라지지 않는 템페라 물감(달걀 노른자 등을 섞은 물감)을 사용해서, 그는 비현실적으로 짙은 고산지대 하늘의 파란색과 보라색을 그렸습니다.
산 꼭대기(1924).
하늘의 힘(1934).
티베트, 히말라야(1933).
그렇게 지난 세월이 5년, 걸어온 길은 2만5000km. 레리히는 1927년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티베트 수도 라싸(Lhasa)의 턱밑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이 도시에 입성해 달라이 라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간 꿈꾸던 ‘불교 제국’의 밑그림을 완성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는 거대한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고 맙니다.
설산에서의 다섯 달
레리히가 라싸로 들어가려 한다는 소식에 영국 정보부는 즉시 반응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곧바로 티베트 정부에 통보했습니다. “레리히는 러시아 스파이다. 절대 도시에 들이지 마라.” 그리고 레리히 일행은 티베트군에 포위됐습니다.
하지만 레리히는 발길을 돌리지 않고 기다리기를 택했습니다. 곧 오해가 풀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영국 정보부는 레리히 일행을 고원에서 말려 죽이기로 작정한 상태였거든요.
히말라야로 가는 계단(1924).
히말라야(1941).
현실을 직시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히말라야의 겨울이 닥쳤고, 영하 40도의 추위가 원정대를 포위했습니다. 짐을 실어 날라 줄 가축 102마리 중 92마리가 얼어 죽었습니다. 이동 수단이 사라지면서 텐트는 ‘얼음 감옥’이 됐습니다. 영국 입장에서 이는 세련된 ‘스파이 처형’이었습니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유명 인사를 직접 체포하거나 사살하면 외교 문제가 되지만, 조난 사고로 죽었다면 아무도 할 말이 없으니까요. 레리히 일행은 동물 사체로 벽을 쌓아 바람을 막으며 악착같이 버텼지만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대원 5명이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이 생지옥 속에서도 레리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그의 작품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야망의 좌절, 죽음에 대한 공포, 고립감, 그리고 희박한 공기와 추위 속에서 희미해지는 정신이 그의 그림에 ‘숭고한 공포’를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레리히의 눈에 들어온 산은 이제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산은 레리히의 운명을 지배하고 압도하는 거대한 대자연이자, 신(神) 그 자체였습니다.
울트라마린, 코발트 바이올렛, 프러시안 블루…. 해발 4600m,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차갑고 선명한 색채. 훗날 평론가들은 이 색채를 보고 ‘우주적인 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미술계에서는 이 시기 작품을 레리히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합니다.
칸첸중가(1936).
그리고 다섯 달이 지났습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돌아왔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레리히 일행에게 티베트군은 길을 열어 줬습니다. 하지만 이는 라싸로 향하는 길이 아닌, 산을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당장 떠나라.” 추방 명령을 받은 레리히는 빈손으로 미국에 돌아갔습니다.
예술가, 몽상가들
이상적인 불교 제국을 세우겠다는 레리히의 허황된 꿈은 좌절됐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무의미한 건 아니었습니다. 여행 중 중국 군벌의 만행, 몽골의 파괴된 사원, 도적떼의 살인과 범죄를 목격하며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잡았습니다. ‘문화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인류는 결국 모든 아름다움을 부숴버릴 거야.’
메인주 몬헤건(1922).
1932년 레리히 조약을 위해 모인 국제회의 대표단. 위에 레리히가 만든 '평화의 깃발'이 걸려 있다. 세 개의 원은 각각 종교, 지식, 예술을 상징한다.
그는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백악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전쟁 중에도 예술품과 문화유산은 보호받아야 해요. 국제 조약이 필요합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낮던 그때, 폭탄을 종이 조약으로 막겠다는 건 그야말로 몽상가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순수하고 무모한 열정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당대 권력자와 지성인들에게 감동을 줬습니다. 결국 1935년 4월, 미국을 포함한 21개국은 ‘레리히 조약’에 서명하게 됩니다. 전쟁 중에도 가급적 문화재를 지키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깃발 디자인은 레리히가 맡았습니다. 이는 원래 나라를 세우면 국기로 쓰려고 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레리히의 말년은 불운했습니다. 194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레리히의 제자였던 부통령 후보(전 농림부 장관) 헨리 월리스를 공격했고, 레리히와 월리스가 주고받은 ‘비밀 편지’를 폭로하려 했습니다. 월리스는 레리히를 칼같이 ‘손절’한 뒤 “사기꾼”이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세청 등 국가 기관을 총동원한 압박이 들어오자 레리히는 인도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현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를 알지 못했던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카일라스로 가는 길(1933).
브라마푸트라(1945).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리히를 어리석다고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몽상가입니다. 자신의 머릿속 상상으로 이 세상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레리히는 그중에서도 스케일이 아주 큰 몽상가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의 몽상은 실제로 세상을 바꿨습니다. 지금도 전쟁터의 문화재 보호 구역에는 레리히가 만든 깃발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그의 예술은 인류가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1961년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우주에서 지구를 처음 본 순간, 항해 일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상적인 색채를 보았다. 마치 화가 니콜라스 레리히의 캔버스처럼!” 몽상가가 그린 비현실적인 색채가, 실은 우주의 진실과 가장 맞닿아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칸첸중가(1935~1936).
우주 비행 같은 거창한 일을 하지 않는 우리에게도 레리히의 예술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소음과 열기로 가득 찬 도시, 그 뜨거운 열병을 식히는 데는 레리히가 남긴 신비롭고 서늘한 세계가 제격입니다. 눈보라 치는 고원에서 그가 그림에 붙잡아둔 저 절대적인 고요함은 언제나 시리도록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번 기사는 Nicholas Roerich: The Artist Who Would Be King(John McCannon 지음), Altai-Himalaya(레리히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1927년 겨울, 해발 4600m의 티베트고원. 끝없이 펼쳐진 회색 하늘 아래 칼날 같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밤이면 영하 60도까지 기온이 곤두박질치는 이곳. 산소가 희박해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죽음의 땅’ 한복판에 기괴한 벽이 세워졌습니다. 그 벽은 벽돌이 아니라, 얼어 죽은 낙타와 야크의 사체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그 벽 안쪽에는 티베트 원정대의 초라한 텐트가 있었습니다. 여름용 텐트의 얇은 천 너머 스며든 한기는 배낭 속 술병을 얼려서 릴게임종류 터뜨렸고, 태엽 시계의 태엽을 망가뜨렸습니다. 원정대원 다섯 명, 동물 90여마리가 이미 추위로 숨을 거둔 상황. 바람을 막기 위해 원정대는 어쩔 수 없이 동물의 사체로 텐트 주위에 방풍벽을 세워야 했습니다. 텐트 안의 사람들은 한데 모여 말없이 떨고 있었습니다.
히말라야( 오리지널골드몽 1933).
하지만 이 비극 속에서도 원정대 대장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습니다. 아침마다 그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눈 덮인 히말라야의 봉우리, 척박한 고원의 빛깔,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이상적인 세계. 그림 속 마치 환상처럼 짙은 파란색과 서늘한 보라색은 극한의 추위와 희박한 공기, 고산지대 온라인골드몽 의 직사광선이 만들어낸 사실적인 색채였습니다.
원정대장의 이름은 니콜라스 레리히(1874~1947). 세계적인 화가이자 탐험가, 고고학자. 인기 요가 수련법인 아그니 요가의 창시자이자 미국 부통령이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고, 훗날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요. 코끝 시린 겨울을 맞아 릴게임사이트추천 , 차가운 공기와 눈을 누구보다도 신비롭고 아름답게 표현한 레리히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레리히의 자화상.
화가가 나라를 세운다고?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류층 집안 출신 바다이야기오락실 인 레리히는 엘리트 코스를 골라 밟은 만능 인재였습니다. 그는 10대 때부터 선사시대 유적 발굴에 참여하며 고고학적 지식을 쌓았고, 대학에서는 법학과 미술을 동시에 전공했습니다. 그림 실력, 법학 지식, 행정력, 정치력을 모두 갖춘 덕분에 그는 1906년 불과 서른두 살의 나이로 러시아 최대 예술 학교(황실 예술 장려 협회)의 학교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1920년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미국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지만, 레리히의 성공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는 현지 부자들의 지원으로 뉴욕에 음악, 무용, 미술 등 예체능을 통합해 가르치는 ‘마스터 인스티튜트’를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가 ‘대박’이 나면서 그는 순식간에 뉴욕 문화계의 거물이 됐습니다. 뉴욕 맨해튼에 ‘마스터 빌딩’이라는 29층짜리 빌딩까지 올렸습니다.
위대한 희생(1910). 원시 종교를 묘사한 작품이다.
우상(1901). 슬라브족의 원시 종교를 묘사한 작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미술관
물건너에서 온 손님들(1901). 바이킹의 러시아 도착을 묘사한, 러시아 역사 관련 작품이다. 선명한 색채 대비가 인상적이다. /트레야티코프 미술관
하지만 누가 봐도 완벽한 이 엘리트 화가에게는 기이한 면모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불교의 구세주인 미륵불과 연결된 선택받은 존재라고 믿었거든요.
이렇게만 설명하면 레리히는 정말 위험한 인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레리히의 정신이 이상했던 건 아닙니다. 당시 유럽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신비주의와 음모론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같은 혼란이 벌어지는 시대. 사람들은 어떤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있다고 믿고 싶어 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술가는 특별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 이들이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 혹은 독특한 미신에 진지하게 빠져드는 예술가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마지막 천사(1912). 제1차 세계대전을 예견하는 종말론적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불타는 하늘, 천사의 강림을 그렸다. /뉴욕 레리히박물관
문제는 레리히가 압도적인 능력과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는 겁니다. 모든 걸 깨달은 듯한 레리히의 언행을 본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은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월스트리트의 거부(巨富) 루이스 호치가 레리히의 ‘물주’를 자처하며 그의 활동을 아낌없이 후원한 게 단적인 예입니다. 특히 당시 미국 정부의 농림부 장관이자 훗날 부통령이 되는 헨리 월리스는 레리히를 ‘나의 스승(Guru)’,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레리히는 이 거물 ‘제자’들을 등에 업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미국 농림부로부터 지원을 끌어내 ‘중앙아시아 원정대’를 꾸린 겁니다. 겉으로는 희귀 식물 표본을 모으는 게 목적이었지만, 그의 진짜 목표는 중앙아시아에 ‘이상적인 불교 제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조상들(1911). /옥스퍼드 애슈몰린 박물관
희박한 공기 속으로
1923년 원정대는 인도에서 출발해 히말라야로 향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샹발라(Shambhala)’를 찾는 것. 샹발라는 ‘샹그릴라’의 모티프가 된, 티베트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상향이었습니다. 그곳에 불교 제국을 세우고 여러 종교를 하나로 합쳐 인류를 새로운 정신세계로 이끄는 게 레리히의 목표였습니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발상입니다. 하지만 레리히와 후원자들은 진지했습니다. 이득을 챙길 꿍꿍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방향은 좀 이상했지만, 이들의 열정은 그저 순수했을 뿐입니다.
레리히가 원정 도중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향해 장관들을 만난 것도 이런 순수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소련의 고위 관료들을 만나 이렇게 제안합니다. “내가 아시아에 새로운 불교 국가를 세울 테니 지원해 달라. 그러면 소련과도 친하게 지내겠다.” 그의 머릿속에서 ‘만인의 평등’을 외치는 공산주의와 ‘자비’를 말하는 불교는 서로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소련 공산주의의 현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레리히의 행동은 간첩이나 할 법한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세계 각국이 물밑에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지, 이념 대립이 얼마나 무서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과 영국 정보부는 이 모든 과정을 싸늘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기억(1924).
1926년 초 중앙아시아를 걷고 있는 레리히.
어쨌거나 원정은 계속됐습니다. 수년간의 여행길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해발 5000m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추위와 산소 부족, 눈보라, 그리고 도적 떼와의 사투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레리히는 태연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유화 물감 대신 영하 40도의 혹한에서도 얼거나 갈라지지 않는 템페라 물감(달걀 노른자 등을 섞은 물감)을 사용해서, 그는 비현실적으로 짙은 고산지대 하늘의 파란색과 보라색을 그렸습니다.
산 꼭대기(1924).
하늘의 힘(1934).
티베트, 히말라야(1933).
그렇게 지난 세월이 5년, 걸어온 길은 2만5000km. 레리히는 1927년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티베트 수도 라싸(Lhasa)의 턱밑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이 도시에 입성해 달라이 라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간 꿈꾸던 ‘불교 제국’의 밑그림을 완성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는 거대한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고 맙니다.
설산에서의 다섯 달
레리히가 라싸로 들어가려 한다는 소식에 영국 정보부는 즉시 반응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곧바로 티베트 정부에 통보했습니다. “레리히는 러시아 스파이다. 절대 도시에 들이지 마라.” 그리고 레리히 일행은 티베트군에 포위됐습니다.
하지만 레리히는 발길을 돌리지 않고 기다리기를 택했습니다. 곧 오해가 풀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영국 정보부는 레리히 일행을 고원에서 말려 죽이기로 작정한 상태였거든요.
히말라야로 가는 계단(1924).
히말라야(1941).
현실을 직시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히말라야의 겨울이 닥쳤고, 영하 40도의 추위가 원정대를 포위했습니다. 짐을 실어 날라 줄 가축 102마리 중 92마리가 얼어 죽었습니다. 이동 수단이 사라지면서 텐트는 ‘얼음 감옥’이 됐습니다. 영국 입장에서 이는 세련된 ‘스파이 처형’이었습니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유명 인사를 직접 체포하거나 사살하면 외교 문제가 되지만, 조난 사고로 죽었다면 아무도 할 말이 없으니까요. 레리히 일행은 동물 사체로 벽을 쌓아 바람을 막으며 악착같이 버텼지만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대원 5명이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이 생지옥 속에서도 레리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그의 작품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야망의 좌절, 죽음에 대한 공포, 고립감, 그리고 희박한 공기와 추위 속에서 희미해지는 정신이 그의 그림에 ‘숭고한 공포’를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레리히의 눈에 들어온 산은 이제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산은 레리히의 운명을 지배하고 압도하는 거대한 대자연이자, 신(神) 그 자체였습니다.
울트라마린, 코발트 바이올렛, 프러시안 블루…. 해발 4600m,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차갑고 선명한 색채. 훗날 평론가들은 이 색채를 보고 ‘우주적인 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미술계에서는 이 시기 작품을 레리히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합니다.
칸첸중가(1936).
그리고 다섯 달이 지났습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돌아왔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레리히 일행에게 티베트군은 길을 열어 줬습니다. 하지만 이는 라싸로 향하는 길이 아닌, 산을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당장 떠나라.” 추방 명령을 받은 레리히는 빈손으로 미국에 돌아갔습니다.
예술가, 몽상가들
이상적인 불교 제국을 세우겠다는 레리히의 허황된 꿈은 좌절됐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무의미한 건 아니었습니다. 여행 중 중국 군벌의 만행, 몽골의 파괴된 사원, 도적떼의 살인과 범죄를 목격하며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잡았습니다. ‘문화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인류는 결국 모든 아름다움을 부숴버릴 거야.’
메인주 몬헤건(1922).
1932년 레리히 조약을 위해 모인 국제회의 대표단. 위에 레리히가 만든 '평화의 깃발'이 걸려 있다. 세 개의 원은 각각 종교, 지식, 예술을 상징한다.
그는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백악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전쟁 중에도 예술품과 문화유산은 보호받아야 해요. 국제 조약이 필요합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낮던 그때, 폭탄을 종이 조약으로 막겠다는 건 그야말로 몽상가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순수하고 무모한 열정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당대 권력자와 지성인들에게 감동을 줬습니다. 결국 1935년 4월, 미국을 포함한 21개국은 ‘레리히 조약’에 서명하게 됩니다. 전쟁 중에도 가급적 문화재를 지키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깃발 디자인은 레리히가 맡았습니다. 이는 원래 나라를 세우면 국기로 쓰려고 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레리히의 말년은 불운했습니다. 194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레리히의 제자였던 부통령 후보(전 농림부 장관) 헨리 월리스를 공격했고, 레리히와 월리스가 주고받은 ‘비밀 편지’를 폭로하려 했습니다. 월리스는 레리히를 칼같이 ‘손절’한 뒤 “사기꾼”이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세청 등 국가 기관을 총동원한 압박이 들어오자 레리히는 인도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현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를 알지 못했던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카일라스로 가는 길(1933).
브라마푸트라(1945).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리히를 어리석다고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몽상가입니다. 자신의 머릿속 상상으로 이 세상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레리히는 그중에서도 스케일이 아주 큰 몽상가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의 몽상은 실제로 세상을 바꿨습니다. 지금도 전쟁터의 문화재 보호 구역에는 레리히가 만든 깃발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그의 예술은 인류가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1961년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우주에서 지구를 처음 본 순간, 항해 일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상적인 색채를 보았다. 마치 화가 니콜라스 레리히의 캔버스처럼!” 몽상가가 그린 비현실적인 색채가, 실은 우주의 진실과 가장 맞닿아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칸첸중가(1935~1936).
우주 비행 같은 거창한 일을 하지 않는 우리에게도 레리히의 예술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소음과 열기로 가득 찬 도시, 그 뜨거운 열병을 식히는 데는 레리히가 남긴 신비롭고 서늘한 세계가 제격입니다. 눈보라 치는 고원에서 그가 그림에 붙잡아둔 저 절대적인 고요함은 언제나 시리도록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번 기사는 Nicholas Roerich: The Artist Who Would Be King(John McCannon 지음), Altai-Himalaya(레리히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